반도체 R&D, ‘야근 전쟁’ 시작..'6개월 연장근로 허용'

11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정부는 반도체 연구개발 분야의 근로시간 유연화를 위해 특별연장근로 등 근로시간 제도 전반을 재검토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관련 행정지침 개정을 논의 중이다. 특별연장근로는 불가피한 사유로 법정 연장 근로시간을 초과해야 할 경우, 근로자 동의와 고용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 주 최대 64시간까지 근로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현재 연구개발을 사유로 특별연장근로를 신청할 경우, 한 번에 최대 3개월까지 허용되며, 이를 최대 3번 연장할 수 있어 총 12개월까지 가능하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특별연장근로 활용이 쉽지 않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인가 절차가 복잡하고 근로자 동의를 얻는 과정이 까다로워 실질적으로 연구개발을 이유로 이 제도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1회 최대 인가 기간을 기존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를 통해 연구개발 성과를 내는 데 보다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김문수 고용부 장관은 이날 경기 성남 판교 동진쎄미켐 R&D센터에서 열린 ‘반도체 연구개발 근로시간 개선 간담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업계 얘기를 들어보면 현행 1회 인가 기간인 3개월은 연구개발 성과를 내기에는 다소 짧은 기간”이라며 “6개월 정도면 기업도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가 싶다”고 밝혔다. 이어 “입법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이번 조치는 행정지침 개정을 통해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달도 안 걸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연구개발 직군의 근로시간 규제 완화 문제는 오랜 기간 논의돼 왔다. 반도체는 치열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 기술 개발 속도가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산업으로, 연구개발 과정에서 근로시간이 유연하게 운영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업계의 지속적인 요구였다. 특히 미국, 일본, 대만 등 주요 반도체 강국들이 국가 차원에서 반도체 산업을 적극 육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근로시간 규제에 묶여 충분한 연구개발을 하지 못한다면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컸다.
이와 관련해 업계에서는 정부의 이번 조치가 일정 부분 도움이 될 것으로 평가하면서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는 어렵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특별연장근로 제도는 노사 간 합의와 불가피한 사유, 고용부의 사전 승인이 필요한 만큼 활용 자체가 쉽지 않다”며 “이 제도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도입을 요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영계에서도 특별연장근로 기간 확대가 완전한 해결책이 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결국 정부의 규제 하에 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며 “연장근로를 허용받기 위해서는 업무량 증가 사유, 연장근로 필요성 등을 상세히 증명해야 하고, 이에 대한 서류 제출 부담이 기업들에게 여전히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역시 특별연장근로 활용 확대를 반대하지는 않는 분위기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최근 최고위원회의에서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조항이 불필요한 이유로 특별연장근로 제도를 언급하며, 현행 제도를 적절히 활용하면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근로시간 규제 완화가 근로자의 건강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여전히 존재한다. 노동계에서는 연구개발 직군이라고 하더라도 장시간 근로가 지속되면 피로 누적과 업무 효율 저하가 발생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대책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정부가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기존 주 단위에서 월 단위 또는 분기 단위로 바꾸는 방안까지 검토할지는 미지수다. 한 재계 관계자는 “연장근로 관리 단위 변경은 노동계의 반발이 심하고, 민주당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정부가 쉽사리 추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날 간담회에서 참석한 기업 관계자들은 근로시간 규제가 산업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하며, 보다 실질적인 규제 완화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준혁 동진쎄미켐 부회장은 “반도체 산업은 납기 일정이 매우 중요한데, 근로시간 규제로 인해 연구개발이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안태혁 원익IPS 대표이사는 “반도체 연구개발은 특정 시기에 집중적인 근로가 필요한 경우가 많은데, 6개월 정도의 유연한 대응이 가능하도록 보장해 준다면 기업 운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역시 글로벌 반도체 경쟁 속에서 한국 기업들이 근로시간 규제에 발목이 잡혀 있는 현실을 우려했다. 그는 “반도체 산업은 기술 전쟁이며, 기술 전쟁의 핵심은 결국 시간 싸움”이라며 “미국, 일본, 대만은 반도체 생태계 육성을 위해 국가 차원의 강력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중국 역시 한국의 주력 산업인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빠르게 추격해 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근로시간 규제에 묶여 제대로 경쟁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글로벌 시장에서 점점 뒤처질 수밖에 없다”며 규제 완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부는 향후 고용노동부를 중심으로 특별연장근로 제도의 개선 방안을 구체화하는 한편, 업계 의견을 지속적으로 수렴해 추가적인 보완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그러나 업계와 노동계, 정치권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만큼, 실질적인 제도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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